영조대왕과 나뭇꾼
21대 영조는 궁녀의 심부름꾼인 천한 무수리의 몸을 빌어
탄생한 19대 숙종의 서자이며 어머니가 비천하여
왕자이긴 하였으나 몹시 천시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장희빈의 아들인 20대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자손이 없이 승하하자
세제로서 대통을 이었지만 아버지 숙종이 승하하고 이복형 경종이
재위한 4년간은 궁궐 외곽 초라한 집에서 어렵게 살아 왔으며
등극하기 전에 일반 민초들의 고통을 너무 잘알기에 재위기간 동안
수많은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가장 많이 주었던
이조시대 명군중에 명군이었던 임금이다.
영조는 83세까지 장수 했으며 임금 노릇도 52년간이나 한왕이다.
그러나 영조의 어머니 무수리 최씨는 생전에는 빈(嬪)의 대우도 받지 못했고
영조의 아버지 숙종 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 양주땅 고령산 기슭에 묻혔으나
그것은 초라한 묘로서 대신들의 산소에 비해서도 형편이 없었다.
궁중예법에 따라 능호(陵號)는 물론이요, 원호(園號)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능호가 부여되지 않으니 영조는 임금이 된지 30년이 넘었고
영조자신 환갑이 지났으나 생모 묘전에 성묘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영조는 <내가 임금으로서 죽기전에 어머님 묘소를 능으로 봉하고
떳떳이 어머님께 성묘라도 해야겠는데....
왕실법도와 신하들의 반대 때문에 인륜의 도리도 못하고 있다라고
늘 한탄 하고 있었다.
생모 최씨묘를 능으로 봉 하라고 어명을 내리면 신하들은
<부왕(父王)께서 하시지 않는 일로 모후에게는 효가 될지언정
부왕에 대한 불효이니 거두어 주시옵소서라고 읊조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애간장만 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수차에 걸쳐 신하들과 싸우고
또 싸워 능호는 절대불가하고 겨우 원(園)으로 봉하여
소녕원(昭寧園)으로 승격시키고 드디어 어머니 묘소에 성묘하며
그간의 불효에 백발의 노(老)왕은 체면도 잊은채 대성통곡 하였던것이다.
죽기전에 꼭 어머니묘를 원에서 능으로 승격시켜 드리겠노라 다짐한다.
소녕원이 있는 능참봉에 대해선 특별대우를 하게되고 치산(治山)을 잘하여
나무가 웅성하고 경치가 좋아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소녕원 근처에서 나무를 땔감으로 할경우에는
엄벌에 처해지게 되며 백성들은 근접도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조는 어느날 미복차림으로 홀로 궁을나와 서대문밖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마침 시골의 나뭇꾼이 향나무를 내려 놓고 살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영조임금은 그 향나무가 보기좋아 궁중에 심어놓고 싶은 생각이 들어
나뭇꾼에게 어디서 캐온 것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나뭇꾼은 양주 고령산에서 캐온 나무라고 대답했다.
양주 고령산이라...거긴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가 묻혀있는 소녕원이 있는곳....
이에 영조는 대뜸 어머니 묘소 소녕원이 생각났으나
양주 고령산이 어디냐고 넌즛이 모르는체 물었다.
이에 나뭇꾼은 신수는 훤하게 생긴 생원양반이...
고령산 밑에는 나랏님 모후가 계시는 소녕릉이 있는
명산중의 명산도 모르냐고 영조임금에게 핀잔을 주었던 것이다.
또 그것도 모른다하여 생원으로 격하시켜 호칭했던 것이다.
영조임금은 아니 거긴 소녕원이 있는 곳이지 소녕릉은 아니지 않느냐고
나뭇꾼에 되물었으나 무식한 나뭇꾼은 릉과 원을 구분못하고 소녕원이 아니고
소녕릉이 있다고 우겼던 것이다.
그렇게 릉(陵)으로 승격시키고 싶었으나 신하놈들과 30년을 싸워
겨우원(園)으로밖에 못해 드렸는데 무지랭이 나뭇꾼이 내어머님 묘를
릉이라고 부르다니...영조는 그나뭇꾼이 소녕릉이라 우기는 소리에 감격하고.
내 당신의 나무를 비싼값에 쳐줄테니 따라 오라하고 경희궁으로 들어갔다.
나뭇꾼은 경희궁을 큰대감댁 집정도로 알고 뒤따라가니 관원들이
정중히 맞아 들이는데....영조임금은 저 나뭇꾼이 귀한 손님이니 후히
대접하고 나뭇값을 2 배로 주도록 하라...라고 영을 내렸다.
후한 대접과 나무값을 받고 난 나무꾼은 관원에게
<나리! 이댁이 어느 대감댁입니까?> 하고 물었다. 관원은
상감께서 후히 대접하라 하시기에 상놈 나뭇꾼을 함부러 대하지도 못하고..
의아하여 < 아니 당신은 "상감마마"를 모르신단 말이요? > 하고 되물었다.
앗! 상감마마...소녕원에서 몰래캐온 향나무를 팔려고 왔는데...
하필이면 상감마마한테 팔았는가...
이제 난 영락없이 죽었다 생각했으나 관원에게
<나리 저 향나무는 절대로 소녕릉 능림에서 캔게 아니고
고령산 깊은 산속에서 캔것이오니 목숨만 살려주십쇼>라고 애걸 복걸하였다. ..
도대체 관원은 무슨 소린지 알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금후에 영조임금이 용포를 거치고 신하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나타났다.
나뭇꾼은 뜰아래 부복하여 <아까는 상감마마를 몰라 뵙고 생원이라
불경하와 죽어도 마땅하오나 저나무는 절대로 소녕릉에서 캐온것이 아니오니
통촉하시옵고 목슴만 살려 주시옵소서..>라고 목숨을 애걸 하였다.
영조는 벌을 내리기는 커녕...
내 너같이 과인의 불효한 마음을 달래준 충직한 백성에게
벼슬을 내리고 싶으니 하고 싶은 벼슬을 말하라 하니 나뭇꾼은
<소녕릉 청지기 정도 시켜 주시오면 이몸 죽을때까지 성심을 다하겠나이다>했다.
영조임금은 계속 소녕릉이라 부르는 나뭇꾼의 소리에 기분이 좋아서
나뭇꾼을 청지기 보다 상위직인 능창봉에 제수하였다.
능참봉이나 능청지기에 들켰다면 다리 몽둥이가 뿌러지던,,
목슴이 날라갈뻔 했는데... 영조임금을 만난 통에 벼락 감투를 쓰게된 것이며
어정(御定) 능참봉이 되어 아무도 그지위를 손댈 수없는
능참봉이 되어 대대손손 부귀를 누렸다고 한다.
영조임금의 무수리출신 생모 최씨(숙빈)에 대한 효성을 느낄 수있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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