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한민국

인물에세이 이승만

시인김남식 2018. 4. 11. 16:37

김동길 인물에세이 100년의사람들 이승만(1875~1965)

"고종 퇴위 부르짖다 사형선고 받고 5년7개월 옥살이한 그
미국서 독립운동하던 중 우정 당국 찾아가 태극기 넣어야 한다고 주장
부정선거로 또다시 망명길… 좁은 병실서 말년 보내며 단 한 번도 조국 원망 안해"

이승만 일러스트
이철원 기자

여러 해 전 배재학교 출신 졸업생들을 만나 그들에게 한마디 격려사를 하게 됐다. "배재 출신들은 큰일을 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왜? 고조선은 단군이 세웠지만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세운 인물은 배재학당을 1897년 졸업한 이승만이기 때문이다." 졸업생들은 모두 그 말을 듣고 박수 갈채를 보냈다.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마디 덧붙이고 격려사를 끝냈다. 나는 지금도 그가 없었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16대 조상이 양녕대군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가난하기 짝이 없는 몰락한 양반집 아들로 태어났다. 한말의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과거에 장원급제해 가문을 빛내고 싶었지만, 매관매직이 횡행하던 시절이라 낙방했다. 실망을 딛고 선교사들이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한 그는 졸업식에서 유창한 영어 연설 덕에 선교사들의 총애를 받아 졸업과 동시에 그 학교에서 후배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에 가담해 1898년 고종의 퇴위를 부르짖다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일로 5년 7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고 특별 사면됐다. 이후 민영환과 한규설의 주선으로 한국이 독립을 유지하게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 존 헤이 국무장관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면담도 했지만, 대세는 기울어져 한국을 일본의 세력 범위 내에 밀어 넣는 루트·다카히라 협약이 맺어졌다.

그러나 이승만은 낙심하지 않고 미국 땅에 머물며 학업에 매진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조지워싱턴대학에 편입해 졸업했고, 뒤이어 하버드대학 대학원을 거쳐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9년 독립만세운동으로 탄생한 상해임시정부는 그를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했고 그 이듬해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지만, 임시정부 내 분열과 반목을 견디다 못해 그 자리를 물러났다. 그때부터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미주를 무대로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당시 다 떨어진 와이셔츠를 입고 하와이의 와이키키 해변을 거니는 그를 보고 조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리라고 짐작한 이는 없었다.

1940년대 미국 우정국이 발행한 기념우표 시리즈의 주제는 '핍박받는 나라'들이었다. 10국이 선정됐는데 폴란드, 헝가리 등 나라의 국기가 실려 있었고 맨 마지막 10번째에 태극기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놀라서 필라델피아에 살던 건축가인 동시에 우표 수집의 대가이던 이병두씨를 만나 어떻게 태극기가 핍박받는 나라 시리즈에 끼어들 수 있었는가 물었다. 그는 이승만이 미국 우정 당국을 방문해 일본에 강제로 합방돼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한국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승만의 그런 노력과 독립투사들의 끈질긴 투쟁이 열매를 맺어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이 확정되고 포츠담 회담에서 그 결정이 재확인됐다. 그러나 해방의 그날이 노인이 된 김구나 이승만에게 있어서는 너무 뒤늦게 찾아온 기쁨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운형은 1947년 암살당했고 김구는 1949년에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저격당해 쓰러짐으로써 정계가 어수선해진 가운데 당시 한국의 정치판은 이승만만이 인물로 남게 됐다.

그는 이미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한반도가 분단돼 소련이 지원하는 인민공화국이 북에 설립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38선 이남에 되도록 빨리 대한민국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만일 그에게 그런 확고한 신념이 없었다면 1948년 대한민국은 출범하지 못했을 것이다. 6·25사변이 터졌을 때 그의 투지와 결단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틀림없이 세계 지도에서 지워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승만은 무리하게 3선 개헌을 밀어붙여 정치판을 혼란하게 만들었고 3·15 부정선거 때문에 확고부동하던 정치적 바탕도 흔들리고 말았다. 물론 그가 나서서 3·15 부정선거를 꾸민 일은 없고 단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던 자들의 흉계였지만, 4·19로 인해 이승만은 일단 국민에게 사과하며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홀연히 또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5년의 세월을 망명지에서 무료하게 지내다가 91세에 노환으로 좁은 병실에서 영원히 눈을 감았다.

이승만에 대해 가장 큰 원한을 품고 있는 자는 김일성이었을 것이다. 북의 인민공화국은 핵으로 무장하고 아직도 적화통일을 꿈꾸고 있다. 이승만이 살아 있었다면 대한민국이 변함없이 한반도의 유일무이한 합법 정부였을 것이고 오늘과 같은 정치적 위기도 오지 않았 을 것이다. 김일성의 눈으로 대한민국을 본다면 이승만을 역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늘 적화통일을 희망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이 절대다수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년에 허술하고 좁다란 병실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이승만은 단 한마디도 대한민국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에머슨의 말대로 위대한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3/20180413017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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