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한민국

인물에세이 전두환

시인김남식 2017. 12. 11. 11:24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4) 전두환(1931~)

날 중정 지하실로 데려가 수직 물러나라고 강요 럼에도 훗날 가까워져 / 이철원 기자


역사적 인물에 대하여는 존칭을 붙이지 않는 것이 관례이건만 11대, 12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고 현재 생존해 있는 그를 전두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 대통령이라는 세 글자를 붙이기로 한다.
1979년 10·26 사태가 벌어졌을 때 군사독재는 끝나고 민주화의 새 시대가 올 거라고 우리 모두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민주화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새로운 군부가 등장했다. 그 짧고 허무했던 민주화의 꿈속에서 나는 연세대학교 부총장으로 추대됐다.

머지않아 이우주 총장 뒤를 이어 총장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신군부를 이끌던 전두환 장군은 나를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데려가 여러 날 가뒀다. 그의 부하들은 그 지하실에서 나에게 부총장직과 교수직 사표를 동시에 쓰라고 강요했다. 그리하여 석방은 되었으나 나는 졸지에 무직자가 됐다. 그러고는 이화여대 총장을 지내고 물러난 누님(김옥길)이 지내던 경북 조령산 기슭에서 10년 가까이 누님이 지어주는 밥을 먹으며 연명하는 암울한 세월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훗날 전두환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가 됐다. 그의 과(過)보다 공(功)에 더 관심을 갖게 되고 또 그의 인간성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가 보안사령관이 되어 권력의 정상을 향해 가고 있다고 여겨질 때 항간에 나돌던 말이 있다. 그가 연대장이 되면 그의 연대에 끼어들기를 바라는 대대장이 많았고 사단장이 되면 그 사단에서 연대장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대령이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의 밑에 있으면 신분이 보장되고 진급도 빠르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와 손잡고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모두 '그는 한번 믿은 사람은 죽는 날까지 믿어주고 밀어준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그가 '의리의 사나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도 까닭이 없지 않다. 그는 전문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을 존중했다. 전문가들에게 그는 "나는 한평생 군인이라 이 분야에 대해 전혀 모릅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 제발 이 일을 전적으로 맡아주세요"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모르는 일에 나서지 않았고 엘리트들을 전적으로 신임했다.

그의 집권 과정에서 불상사가 적지 않았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예로 들 수밖에 없다. 당시 그는 보안사령관이었다. 설령 그가 발포 명령자가 아니라 해도 그 일에 대해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하나 큰 비극은 1983년 10월 9일 버마(미얀마) 아웅산에서 벌어진 속칭 '아웅산 테러'였다 그것은 북한의 하수인들이 벌인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서석준(당시 부총리), 이범석(외무장관), 김재익(경제수석)을 비롯해 정부 요인 17명이 졸지에 목숨을 잃은 비극은 오늘도 살아 있는 전 대통령에게 어두운 그림자로 남아 그를 괴롭히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인연으로 전두환 대통령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는가. 막역한 친구이던 노태우씨를 전적으로 밀어 대통령 자리에 앉힌 뒤 전두환 대통령 내외가 백담사 유배를 갈 수밖에 없었던 그때부터 나는 그에 대해 큰 관심을 갖게 됐다. 그 뒤에 벌어진 정가의 3당 통합은 이 나라에 야당 정치가 없음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그런데 14대 대통령은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고, 법정은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을 선고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이제부터 한국 정치는 원칙도 의리도 없다고 판단하고 크게 실망했다. 15대 대통령이 탄생하기 직전 두 전직 대통령은 사면 복권되었지만 상처는 그대로 있다.

지탄의 대상이 된 그를 내가 만난 것은 한참 뒤 일이다. 그가 나를 한 번 자기 집에 초대했기에 나도 그를 초대하면서 우리 집 마당에서 대접할 수 있는 것은 빈대떡과 냉면밖에 없다고 했다. 몇 사람 같이 와도 좋다고 말했는데 약속한 날짜가 가까이 왔을 때 그는 참석자 명단을 보내왔다. 거기에는 50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엄청난 숫자는 나에게 통쾌한 느낌을 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그를 보통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게 됐다. 그날 장세동씨를 비롯해 그의 측근으로 알려진 사람 중에 오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전 대통령은 식성도 좋아서 냉면을 3인분이나 해치웠고 빈대떡도 여러 장 즐겼는데, 다 먹고 나서는 "이 빈대떡 맛이 참 좋습니다. 몇 장 싸줄 수 없어요?" 하고 물었다. 큰 인물은 그렇게 대범하고 대담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내 생일마다 매년 그는 장안에서 제일 큰 난 화분을 보냈고 경호원 여러 명과 함께 와서 냉면을 같이 먹은 적도 있다.

치욕의 계절을 다 이겨낸 인간 전두환은 아직도 건재하다. 정초에나 그의 생일에는 많은 하객이 찾아가는 것이 사실이고 일 년 내내 그를 예방하는 사 람도 적지 않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공(功)이 있고 과(過)도 있기 마련이다. 민주화의 훈풍을 기대하던 온 국민에게 찬바람이 불게 한 그의 잘못은 두고두고 역사가 흘겨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가 조국 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한 사실은 앞으로도 높이 평가될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대통령 전두환은 죽는 날까지 누구를 만나도 당당한 인간으로 살 것이 분명하다.




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12/08/201712080186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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