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대장 운강이강년 장군묘 솔새김남식
화북면 소재지에서 송면으로 가는 길목인 눌재고개를 지나면 우거진 풀섶에 있는 낯선 비석이 길손을 기다린다.
이 눌재 고개는 낙동강과 한강이 갈라지는 분수령으로서 좌우로 청화산과 백악산 능선이 충북과 경북의 경계이다.
눌재고개를 넘어서 내려가는 길에 돌로 세운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장군묘 이정표를 만나게 된다.
이정표를 따라 1키로 산속으로 들어가면 산 초입에 돌 계단이 있다
돌 계단을 따라서 100여미터 위로 올라 가면 산속 깊은 오르막 길에 이장군의 묘가 있다
수염이 그려진 장군석
이강년(李康秊, 1858년~1908년)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한말의 의병장으로 자는 낙인(樂仁), 호는 운강(雲崗)
본관은 전주이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강년은 1858년(철종 9년) 아버지 이기태(李起台)와 어머니 의령 남씨의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1880년(고종 17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종 6품 행용양위부사과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문경 동학군의 지휘관으로 일본군, 탐관오리와 싸웠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제천에서 유인석의 의병과 합류하여 유격장(遊擊將)이 되었다.
묘는 관리를 한지 오래되었는지 묘분이 많이 허물어저 있었다
1905년(광무 9년) 을사조약이 맺어지고 1907년(융희 1년) 고종이 양위당하자 영춘(永春)에서 의병을 일으켜
원주의 민긍호와 합세, 충주를 공격했다.
이해 12월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을 공격할 때(13도 창의군) 가담했고,
그후 가평·인제·강릉·양양·용소동(龍沼洞)·갈기동(葛其洞)·백담사 등지에서 연승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으나
청풍 금수산 전투에서 발목에 총탄을 맞고 체포되어 1908년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향년 51세로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항일 이력으로 인해 가족들은 고향을 떠나 살게 되었으며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인 3명과 일경으로
종사했던 한국인 1명이 이강년 소유의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일대 토지 3,000여 평을 강탈해 갔다고 한다.
그의 가족이 숨어지내는 사이 문경 총독이라는 경찰과 한국인 경찰 이모 씨가 그의 아들을 총칼로 협박해
‘매도’한 것처럼 강제로 도장을 찍게 했다고 한다
묘가 있는 이곳의 주소지는 경북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산 11번지 이다.
2002년에 개관한 운강 이강년기념관 雲崗李康秊記念館이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 있다
1000미터의 청화산을 돌고도는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