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古宮)의 눈물(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 솔새김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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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궁궐은 = 배산임수 ; 산을 뒤로 하고 물을 앞에 둔다
전조후침 ; 앞에는 집무공간 뒤에는 생활공간
구중궁궐 ; 여러전가과 여러겹의 담장으로 외부의 침입을 막았다
동궁동조 ; 세자와 대비의 거처는 동쪽에 둔다
정전 ; 공식업무 공간
편전 ; 일상업무 공간
침전 ; 정경생활 공간으로 구분하였다.
궁궐의 정문과 정전 = 경복궁 ; 광화문. 근정전
창덕궁 ; 돈화문. 인정전
창경궁 ; 흥화문. 명정전
덕수궁 ; 대한문. 중화전
경희궁 ; 흥화문, 숭전전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경운궁) 그리고 경희궁(경덕궁)이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하고 나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뒤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궁궐인 경복궁을 1394년에 세웠다
그리고 1405년 태종때는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하였다.
이로써 正宮인 경복궁에 이어 二弓 창덕궁인 兩闕 체제가 확립되었지만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하였다.
(이 大木에서 왜 그랬을까를 생각해 보니 치마폭이 그리워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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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종때 세분의 대비를 위해 창경궁을 세우게 된다.
즉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 소혜왕후 한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이다
이곳은 원래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지은 수강궁을 확장해서 세운 별궁이 바로 창경궁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불타 없어지게 되자
선조는 창덕궁을 재건하게 되는데 1610년 광해군때 완성하여 270여년간 경복궁을 대신하여
정궁 역할을 하였으며 창경궁은 1616년에 복원되었다.
경복궁이 풍수지리학적으로 길하지 못 하다는 판단에서 당시는 재건을 유보하였으며 고종때 재건하게 된다.
반면 덕수궁(경운궁)은 원래 성종의 형 월산대군 후손의 집이었으니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임시로 거처하는 행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경운궁이라 이름지어 7년간 왕궁으로 사용하게 된다
(덕수란 말은 궁궐 자체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 궁궐에 사는 고종에게 붙여진 이름이었으며 1907년.
일본의 압력에 의해 타의적으로 붙여진 이름이 덕수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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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즉위한 후 인왕산 아래, 지금의 사직단 뒤편에 인경궁, 새문안 길가에
경덕궁(경희궁이란 이름은 영조때 바뀐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몇가지 무리한 정책으로 인하여 왕이 된지 15년이 되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자 그가 지었던 인경궁을 헐어다가 창덕궁과 창경궁을 보수하였다
그러나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燒失되자 경덕궁은 그대로 두어 이궁으로 사용하였다.
이로써 창덕궁과 창경궁이 정궁이 되고 경덕궁(경희궁)이 이궁이 되는 새로운 체제가 성립되어
조선후기 10명(代)의 왕까지 이후 정사를 보았다
즉 이곳에서 숙종이 태어났고,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으며, 숙종, 순조가 승하하였다
조선후기까지 정궁으로 쓰이던 창덕궁은 고종원년에 경복궁이 중건(1868년)되자 그 지위에 변동이 생긴다.
경복궁이 다시 정궁의 지위를 회복하고 창덕궁와 창경궁은 이궁으로 쓰이며
그때까지 이궁으로 쓰이던 경희궁은 빈 궁궐이 되었다.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으로 오가면서 생활하였다.
당시 왕이 궁궐을 옮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1894년 동학란이 일어나자 이를 핑계삼아
청나라와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전쟁을 벌이는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여 고종은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두달도 못되 다시 경복궁으로 옮기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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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이른바 갑오경장(옛날 정치제도를 서양법식을 본받아 고친일)을
실시하게 하는 등 우리나라에 계속 압력을 가했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막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일본은 일본공사 마우라의 지휘아래
일본군 자객들을 동원하여 명성왕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1896년)이 발생한다.
이렇게 압박을 가하는 일본을 외국의 힘으로 막아 보려고 고종은 같은 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시행하자 정궁인 경복궁과 창덕궁은 모두 빈 궁궐이 되고 만다.
다시 돌아 오라는 국민들의 여망의 따라 고종은 1년만에 궁궐로 돌아 오지만 고종은 경복궁도 창덕궁도 아닌
월산대군의 후손의 집을 확장 대대적으로 보수하라는 명을 내리고 경운궁이라고 칭하고 그곳으로 환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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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경복궁에서 왕비가 일본인들에 의해 참혹한 최후를 맞았던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곳을 택한 것이라는데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간 뒤 대한 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경운궁은 1904년의 대화재로 인해 거의 모든 전각들이 소실되었다가 다음해 대부분 전각들이 복원되었다.
경희궁은 당시 광해군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재위기간 대부분을 궁궐을 짓는 일에 힘을 쏟는데.
인왕산 아래 왕이 탄생하는 기운이 서려 있다는 풍수가의 말을 듣고 이복 동생인
정원군(선조의 5째아들 인조의아버지 원종으로추존) 집을 강제로 빼앗아 그 터에 지은 것으로
1616년 광해군 8년에 경덕궁 이었으나 1760년 영조 36년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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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왕들이 태어나고 즉위식을 갖는 등 이궁으로서 역할을 하다가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고 오직 궁궐지의 기록에 의해서 찾아볼 수 밖에 없으며 일제 강점기때
수난을 당한 궁궐은 비단 경희궁뿐이 아니었다.
일제는 경복궁 흥례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설치 하였으며 창경궁에는 동물원과 식물원을 개설하여
일반인에게 관람하게 하면서 격하시켜 '창경원'이라 부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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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조선의 5대 고궁은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 운명을 같이 해온 우리역사의 동반자이다.
시대가 변하여 차차 원래의 모습으로 보수, 복원되어 가고 있지만 지나온 그 역사는 궁궐 각 건물의
공간 안에 현존한다.
그러기에 고궁 탐방은 단지 휴식을 취하고 볼 것을 즐기는 눈요기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숨결을 함께 느껴볼 수 있는 역사 현장으로의 묵상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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