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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진(水産) 작가

시인김남식 2006. 5. 2. 16:35

김우진(水産)작가 (1897~1926년)

출생지 : 전남장성(11세 목포이주)

대표작품 :「산돼지」,「이영녀」,「난파」등

소장자료 : 친필원고 등 144점

 

김우진은 전남 작성에서 당시 군수였던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 목포시 북교동 46번지로 이주하여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구마모토 농업학교를 거쳐 1924년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목포로 귀향하여 영농사업체 사장으로 일하면서 시 50편, 희곡 5편, 소설 3편, 문학평론 20편을 남겼다.

 

강직한 선비 집안의 맏아들

 

김우진은 1897년 장성 군수였던 김성규와 순천 박씨의 장남으로 장성군 용강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호를 처음에는 초여, 일본 유학 중에는 초성, 귀국 후에는 수산을 사용했다. 수산은 목포에서 연유한 것이고 초성은 니체의「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태양을 가리키는 '불타는 별' 의 의미로 지은 것이다.
부친이 장성 호남선우의숙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수학하던 중 동학운동의 여파로 가족이 목포 북교동 성취원으로 이사하였다. 성취원은 유달산 동쪽에 위치한 99칸의 대궐 같은 집으로 부친 김성규가 무안항 감리로 재직하면서 거주하던 곳이다.

소년시절 익힌 한문 실력은 훗날 일본 유학시절에 고전을 탐독하고 시를 지으며 부친과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1910년 목포공립보통학교(현 목포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이후 1913년 일본인들이 다니던 목포공립심상고등소학교를 1년 수료하였다.

 

 

농업학교 시절

김우진은 집안의 토지관리를 위해 농업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으로 가서 현립 구마모토농업학교에 진학했다. 이

학교는 당시 새로운 일본 건설을 위한 첨단농업학교였다.
그는 재학 중 여러 과목을 배웠고 성적도 뛰어났다. 영어(99), 수신(100), 논문(95), 독서(90) 등 유독 인문 관련 과목이

우수했고 특히 영어 성적이 뛰어나 와세다대학 영문과 진학의 계기가 되었다. 이 기간에 빅토르 위고, 셰익스피어

다눈치오 등을 사숙하였다.
17세에 단편소설「공상문학」을 '정로생' 이라는 필명으로 창작할 정도로 문학에 열의를 보였다.

재학 중인 19세에 부친의 뜻에 따라 전남 곡성 출신의 유학자 정운남의 딸인 정점효와 결혼하여 21세에 장녀 진길이 태어났다.
같은 해「조선에서의 삼림사업 일반」이란 제목의 논문으로 농업학교(16회)를 졸업했다.
이 때 뛰어난 논문임을 인정받아 영친왕에게 5원의 우등상금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농업보다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때였다.

 

시대의 지식인이자 문인

 

농업학교 졸업 후에 김우진은 귀국하라는 부친의 뜻을 따르지 않고 1919년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해 1921년 영문과 본과로 진학했다. 동경 유학에서 그는 식민지 시대의 한 지식인이며 작가로서의 문예적 체험과 능력, 선구적인 문학사상을 성숙시켰다. 이때부터「마음의 자취」라는 제목의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 속에는 식민시대 국가 주권의 상실을 통한하면서 일본의 통치에 대한 과감한 저항과 민족자결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유학생들의 정치적 집회에 참여하고 2·8 사건에 관련하여 수감된 유학생들을 수차 면회한 기록도 전한다.
또한 민족어에는 민족적인 영혼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고 한글로 쓴 일기를 통해 작품도 한글로 쓰려는 의지를 밝혔다.그리고 3·1운동 이후 격변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시대정신을 이끌만한 훌륭한 시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나타내었다.

 

 

극예술협회 결성과 연극비평활동

 

1920년 봄 조명희, 홍해성, 김영팔, 유춘섭, 진장섭, 고한승, 조춘광, 손봉원 등 20여명과 함께〈극예술협회〉를 결성하였다.
기존의 낡은 신파극을 비판하고 새로운 근대극을 연구하고 실현하자는 선각적인 목적이었다.

그는 서양의 사실주의 연극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극예술활동을 주도했다.
또한 연극·문학 비평 활동을 하면서 창의적이고 근대적인 문학 창작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1921년 동경 고학생과

근로자들의 모임인 동우회 회관 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국내 순회공연을 결행하였다.
이 순회공연은 임세의 단장, 김우진 연출, 홍해성이 무대감독을 맡고 막간에 홍난파와 한기주의 연주 그리고 윤심덕의 독창이 공연되었다.
부산을 시작으로 40일 동안 25개 지역을 순회하였고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뤘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극운동이며 근대극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의의를 갖는다.

 

귀국, 가업과 문예활동

 

1924년 3월에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6월에 목포로 귀향하여 부친이 가문의 토지와 재산관리를 위해 설립한 상성합명회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그의 포부는 연극운동과 창작, 문예연구 활동을 더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으나 그가 해야 했던 회사 사장의 역할은 매우 분주하고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희곡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친이 그를 위해 '백수제' 라는 2층 서재를 지어주었는데 「정오」,「이영녀」,「난파」,「두덕이 시인의 환멸」,「산돼지」등이 이 무렵부터 집필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출가하기 1년 전 장남 김방한(1925~2002, 전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이 태어났다.
이 한 살배기 아들에 대한 사랑은 각별했다.
후에 집을 나오고 나서도「출가」를 통해 아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현해탄 파도에 잠긴별

 

김우진이 추구한 자유로운 삶과 문학적 포부로 인해 부친과 갈등을 겪었다.
당대 지식인으로서 마음대로 조국을 위해 활동할 수 없었던 일제식민지의 환경도 그를 절망시킨 원인 중 하나였다.
결국 1926년 가족과 재산을 포기하고 집을 나왔다.
도쿄로 건너가 축지 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친구 홍해성의 집에 기거했는데, 목포에서 보내오는 귀가 권고를 거절하면서까지 창작에 몰두하여 완성한 것이 마지막 희곡「산돼지」다.
한편 윤심덕은 오사카에 머무르면서 대표곡〈사의 찬미〉를 비롯한 20여곡을 취입하고 있었다. 도쿄에 머물던 김우진에게 어느 날 그녀로부터 자살하겠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그는 홍해성에게 '그녀를 말리러 가겠다' 알리고 길을 나섰다.
하지만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경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을 향해가던 관부연락선 덕수환 1등칸 3호실에 유서를 남기고

두 사람은 현해탄 바다로 투신하였다.

 

작품세계

김우진은 한국 연극사에서 최초로 서구 근대극을 연구하고 영향을 받은 작가로 본격적인 근대극을 썼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대학시절 연극에 심취하여「소위 근대극 에 대하야」를《학지광》에 발표하면서 시작된 평론활동과 극예술협회 결성,

국내 순회공연 등은 신파극 위주였던 조선의 연극계에 신극운동의 파문을 일으켰다.
이런 부분에서 그는 한국 연극의 개척자로서 문학적 위상을 갖는다.
「아아 무엇을 얻어야 하나」를 비롯한 여러 시는 표현적이고 낭만적인 자신만의 작법을 가지고 있었고「자유의지의 문제」,

「생명령의 고갈」같은 수상록에서는 서구 철학에 바탕을 둔 진보적 사상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독일철학에 심취해 니체의 '초인사상' 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다. '초인사상' 은 아일랜드의 조지 버나드 쇼에게

이식되어 구체화 되었고 그것이 김우진의 희곡 작품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쇼의 희곡「인간과 초인(Man and Super)」을 김우진은 같은 제목으로 대학졸업논문을 써서 철저히 분석해냈다.
자신의 희곡「난파」에서는 쇼의 극작기법을 차용하여 실험적인 작품을 썼다.「산돼지」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여러 문학적 표현기법을 조화시키는 실험을 단행하였다.
김우진은 해박한 식견과 서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한국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최초 신극운동을 일으킨 연극운동가로 평가된다.
17세에 창작한 처녀작 소설「공상문학」을 시작으로 30세 타계하기 전 마지막 희곡「산돼지」까지

짧은 생애 동안 그가 내놓은 창작물은 시 48편, 희곡 5편, 소설 3편, 평론 17편, 논문 1편, 수상록 15편이다.

김우진의 시는「이단의 처녀와 방랑자」를 포함해서 모두 48편이 있다.
1920년대 시단의 경향은 낭만주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투쟁의식, 전통적인 시조형식의 현대적 계승 등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와 달리 김우진은 표현 자체를 몹시 중시하고 표현을 곧 창조로 인식하여 독특한 자신만의 성향으로 시를 썼다. 그의 시는 개인적 삶을 중심으로 한 내면적 갈등과 절망을 낭만적, 주지적으로 노래한 점에서 그 특징이 있다.

소설

김우진이 창작한 소설은 3편이다. 그 외 번역소설로 다눈치오의「영웅」은 미필고이다.「공상문학」은 17세에 쓴 작품으로 신소설이 유행하던 시기에 습작한 것이다. 순자라는 여성이 시집가서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도 '하련당' 이라는 소설가를 마음에 두고 점차 문학에 대한 열망과 근대적 사고방식에 눈떠가는 과정을 다뤘다.「동굴 위에 선 사람」은 대학시절에 일문으로 쓴 소설이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여름, 동경 유학생 '임융길' 이 친구인 남, 그의 여동생 '남신자' 와 함께동경 근처 어촌으로 요양을 간다.

각자의 성격과 사고의 차이로 생기는 갈등을 사건의 전개보다는 심리 묘사에 치중하였다.「방련은 어떻게 해서 나병의 남편을 완쾌시켰나」는 "옛 조선의 아름다운 이야기" 라는 부제를 달고 조선 성종 때에 전남 장성군의 방련이라는 여인이 나병에 걸려죽어가는 남편을 살려낸 이야기이다. 남편의 병이 악화되어 간호를 포기하고 함께 죽으려고 독약을 준비 해놓았는데 남편이 그것을 밤중에 음료로 착각해서 마시고 오히려 되살아났다는 내용이다.

수상록

수상록(에세이)들에서 김우진이 보인 사상가로서의 기질은 다분히 진보적이다.
이탈리아의 가브리엘 다눈치오(1863~1938)처럼 훌륭한 애국시인이 되고픈 열망을 품고 쓴「타씨찬장」을 제외하면 그의 글들은 '생명력의 추구' 를 강조한다.「곡선의 생활」,「생명력의 고갈」,「신청권」등을 통해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가진 생명력에 대해 자유의지를 가지고

부단히 추구할 것을 강조했다.
여기서 자유의지란「자유의지의 문제」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는데 벗어날 수 없는 우주의 인과율 속에서 '살려는 의지'를 말한다.
또 그러한 자유의지는「기록의 마력」에서 선인에 의한 기록만을 맹신하는 인습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필요하다고 역설한다.「출가」

「A Protesto」에서는 출가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집을 나오기까지 겪었던 심적 고뇌를 또 다른 자신을 화자로 설정하여

그와의 대화 형식으로 풀어쓴 것이 특징이다.

 

                                                                                                                             http://cafe.daum.net/welifelove

희곡

김우진이 남긴 희곡은「두덕이 시인의 환멸」,「정오」,「이영녀」,「난파」,「산돼지」총 5편이다.「두덕이 시인의 환멸」은 시인 이원영과

그의 처 그리고 연인인 박정자가 등장한다.
작가는 이원영의 성격과 행위에 관한 이미지를 '두더기(두더기는 누더기의 목포 방언)같은 시인의 환멸' 로 구체화시켰다.

「정오」는 플롯보다는 상황이 더 중시된 습작기의 짧은 희곡이다.
기존세대나 사회현실의 모순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어느 여름날 오전에 어떤 도회지 공원에서

몇몇 낯선 사람들이 우연히 모여 일어나는 이야기이다.「이영녀」는 3막이다.
주인공 이영녀는 모성, 가정, 경제, 사회 문제 등으로 매우 힘든 삶 속에서 매음, 남성과의 동거 등으로 전전하다가 끝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작품은 특히 매음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버나드 쇼의「워렌부인의 직업」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난파」는

복잡하게 얽힌 유교식 가족구조 속에서 근대적 서구 사상을 지닌 한 젊은 시인의 정신적 몰락과정을 그린 것이다.

표현주의 문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한국문학사에서는 처음으로 그 방법론을 차용하였다.

「산돼지」는 김우진의 마지막 작품이다.
인물의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실주의, 상징주의, 표현주의 기법이 사용되었다.

당시 연극계의 실정으로 보아 공연이 어려울 줄 알면서도 대담한 실험을 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또 작품배경에 동학운동을 넣은 것은 당시에 드문 일이었다.

평론비평

 

김우진의 비평은 연극비평과 문학비평으로 나뉜다.
본격적인 비평활동은 1919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한 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비평을 통해 서양의 연극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드러냈다.「소위 근대극에 대하야」에서 당시 서양의 근대극이 지닌 제반 성격을 소개하고「자유극장 이야기」로 앙뜨완느의 자유극장 창설과 그 활동상, 연극사적인 업적을 설명했다.「구미현대 극작가론」에서는 영국의 밀른, 이탈리아의 피란델로 등 세계 여러 극작가의 생애와 작품, 연극사적인 위치를 이야기하였다.
근대극 운동의 중요성과 방법론은「우리 신극운동의 첫길」을 당대의 연극인 홍해성과 공동집필을 하여 나타내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버나드 쇼에 대한 평은「애란인(아일랜드 사람)으로서의 버나드 쇼」나 졸업논문으로 쓴「인간과 초인(Man and Superman-a Critical of its Philosophy)」에 잘 드러나 있다.
이 논문은 당시 최초 본격적인 서구작가 연구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한편 그는 기존 문단에 대한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조선말 없는 조선 문단에 일언」에서는 문학의 보편적인 이론을 전제로 1920년대 초기의 혼미한 문단 풍토를 올바로 정립시키고자했다.
당대 문단의 주축이며 와세다대학 선배이기도 한 이광수 문학에 대하여「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잘하라」라는 평론을 쓰기도 했다.「아관 '계급문학'과 비평가」에서는 계급문학의 창작과 이를 지원할 비평가의 출현을 기대하는 바를 나타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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