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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손병희선생 유허지

시인김남식 2011. 11. 17. 11:38

의암손병희선생 유허지   솔새김남식 


손병희선생은 1919년 삼일만세 운동때 33인의 대표로 민족의 지도자이다

손병희 (1861~1922년)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원(淸原) 출생.  본관은 밀양, 아버지 두흥(斗興)과 어머니는 둘째부인 경주 최씨의 서자로 태어났다.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3년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 ·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 ·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 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62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 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건국훈장이 추서되던 1962년 손병희선생유허지가 완공되었으며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다녀 가쎴고 

또한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필자(솔새)가 준공기념식에 면내 초등학교기 모두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의암손병희선생 유허비" 內容

백성을 도탄속에서 건지고 민족의 정기를 존망의 위기에서 붙드는 것은 그 나라 그 백성된 이의 저마다 잊을 수 없는 소망이라 할지라도 몸을 온전히 구국의 대의앞에 앞장서서 바침으로써 겨레의 잠자는 혼을 일깨워 이끌기란 비상한 사람이 아니고는 능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근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하던 비상한 때에 몸을 초야에서 일으켜 민중운동의 선구자로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역사상에 큰 자취를 남긴 비상한 인물이 있으니 이는 의암 손병희선생 이시다. 선생은 4194년 4월 초팔일 청원국 북이면 대주리에서 나셨다.

천품이 영매 호방하여 어려서 부터 중망을 지녔으나 부패한 사회에  쓰일 곳 없는 몸이라 강개한 세월을 한낮 낭인생활로 울회를 풀 따름이더니 4215년 10월 5일에 선생은 분연히 뜻을 세우고 동학에 입도 하셨다. 이는 근세 조선의 대사상가요 동학의 창도자인 최수운선생의 보국안민 포덕천하의 교지에 깊이 공명하셨기 때문이다. 때에 선생의 나이 스물두살 이었다.

선생은 동학도에 드신 그날부터 방종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문닫고 들어앉아 매일 동학의 주문을 삼만독하고 짚신 두켤레 삼는것을 일과로 하여 정진하며 한달에 여섯번 청주시장에 걸어가 짚신을 팔아 생계를 이으시기를 삼년을 마치고 나서 때마침 친히 선생을 찾아오신 동학 제2세 교조 최해월신사 에게서 동학의 도통을 받으셨다.

선생은 4227년 갑오 동학의거에 최해월의 친명을 받아 보은 장내에서 진을 갖추고 남하하여 전봉준과 합세하셨으니 북접통령으로 동학군을 지휘하여 탐관오리를 베어 제포구민의 기치를 세우고 척양척왜를 포방하여 민족 자주의 대의를 밝히셨다. 선생은 4230년 서른일곱살 되던 해에 동학의 제3세 대도주가 되시고 이듬해 최해월 신사가 순교하자 그 교통을 이으셨으나

휘몰아치는 동아의 풍운앞에 날로 기울어 가는 조국의 운명을 좌시할 수 없어 큰 뜻을 품으시고 이름을 이상헌이라 변칭하여 망명의 길에 오르니 때는 4234년 이었다. 중국 상해에 들려 국제정세를 살피시고 몸을 돌이켜 일본 동경에 머무를 때 노일전쟁이 터지매 선생은 국내의 교중두목과 일본에 망명중인 여러 인사와 손을잡고 진보회를 조직하여 일대 민중운동을 일으켜 독립정신을 고취 하셨다.

때에 일부 반동분자가 발기한 일진회가 일본의 앞잡이로 을사조약을 찬성하는 흉서를 발표하자 선생은 크게 분개하여 권동진 오세창 양한묵등 제공과 같이 급히 귀국하여 동학당으로 매국노가 된 일진회의 주동분자 이용구 송병준등 70여명을 출교시키고

동학을 고쳐 천도교라 개칭하고여 정통 제3세 교주라 일컬으니 선생의 수하에 모이는 자 백만을 헤아리니 교도의 중망을 한몸에 받으셨다. 4241년에는 대도주의 자리를 박인호에게 전수 하시고 경향 각지에 학교를 경영하여 육영사업으로 항일 투쟁의 힘을 길러 조직과 훈련을 굳게 함으로써 시가가 무르익기를 기다리시더니 때마침 일차대전이후 민족자결주의 조류가 일세를 휩쓰자 국내외의 여러 지사와 더불어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그 지도자로 추대 되시었다.

4252년 2월 27일에 선생을  필두로 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동년 3월1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이를 선포하니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독립만세 소리가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천지를 흔들었고 이로써 우리의 임시정부가 상해에 서게 되었다.

선생을 비롯한 33인의 민족대표는 왜경에 붙들리어 서대문 감옥에서 갖은 고초를 당하시던 중 선생은 모진 병환을 얻어 보석되니 서울 상춘원에서 요양하시디가 4255년 5월 19일 드디어 환원하셨다. 향년이 예순둘이요 서울 북한산 밑 우이동에 묻히셨다. 아! 선생의 민족을  위한 일대의 서원은 중도에 꺾이고 말았으나 갑오혁명에 선봉이 되고 갑진 개화에 횃불을 들었으며 기미독립의 진두에서 이 민족을 이끄신 그 맥맥한 정기는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하고 있다. 

이 터전은 산생이 태어나신 옛터요 조국을 위한 불타는 정성을 가꾸시던 고장이다. 풍우당년의 크나큰 감개는 아직도 백성의 마음에 생생히 살아 있거니와 선생이 드리우신 그 높은 정신을 길이 천추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4294년 4월 8일 선생의 탄생 백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조지훈의 글과 배길기의 글씨를 받아 그 이듬해인 4295년 5월 19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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