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新羅) 제 4대 석탈해왕 9년 을축(서기 65년) 춘삼월에 왕(王)이 밤중에 금성(金城西) 서쪽 시림간에서 들려오는 계명성을 듣고 날이 밝자 사자를 보내어 이를 살피게 하였는데 그가 시림에 이르러 살펴보니 금색(金色)으로 된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있고 흰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으므로 곧 돌아와서 이사실을 알리니 왕은 매우 기뻐하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하고 이를 걷우어 길렀는데 그는 점점 자람에 따라 아주 총명하고 지략이 많으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姓)을 김씨(金氏)라 하였고 또한 시림을 고쳐서 계림으로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로 삼았다.
알지(閼智)는 세한을 낳고 세한은 아도를 낳고 아도는 수류를 낳고 수류는 욱보를 낳고 욱보는 구도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는데 미추가 신라 13대 왕위에 오르니 신라김씨는 김알지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가 곧 신라김씨왕조의 개창조이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보면 서기 65(신라 탈해왕9)년에 경주 시림(始林)의 나무가지에 걸려있던 금궤에서 태어나 탈해왕이 '하늘에서 내려준 아들'이라하고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姓)을 김(金)으로 사성(賜姓하사)했다고 전한다.
경주는 경북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기원전 57년 이곳에 6촌(村)이 연합하여 고대 국가를 형성, 국호를 서라벌(徐羅伐)·사로(斯盧)·사라(斯羅)라 하고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하여 국명(國名)을 동일시 하였다. 서기 65년 시림(始林)에서 김씨의 시조 김알지(金謁智)가 탄생하여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고쳐 삼았다가 307년에 신라로 하였으며, 935년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손위(遜位)하자 처음으로 경주(慶州)라는 명칭이 생겼다.
987년 동경(東京)으로 개칭하고, 1008년 별칭으로 낙랑군이라 하다가 1030년 삼경(三京)의 제도가 실시되자 동경(東京)을 설치하였으며, 충렬왕때 계림부로 개칭하는 등 명칭의 변화가 많았다가 1413년에 와서 경주부로 개칭하였다.
우리나라 성씨중 명문거족으로 일컬어진 김씨(金氏)는 김알지(金閼智)의 후예로 전한다.
[삼국사기] 에 김알지(金閼智)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기 65년3월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에서 닭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는데 흰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보고하자 왕은 사람을 보내어 금궤(金櫃)를 가져온 후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탈해왕은 기뻐하여 "이 어찌 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보내 준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하며 거두어 기르니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하여 성(姓)을 김(金)으로 하사 하였으며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으로 고쳐 나라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이렇게 웅기한 김씨는 김알지의 7세손 미추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까지 38명의 왕을 배출하여 587년 동안 신라를 지배해 오면서 왕족의 지위를 지켰으며 역사의 흐름속에서 명문거족으로 가문의 번성을 이룩하여 이름있는 신하와 대유학자, 석학자들를 배출시키면서 근세를 잇는 역사적인 사건속에 명문의 긍지를 살려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김씨는 282여개 본관으로 알려져 있으나, 대략적으로 121개 본관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 북한을 제외한 남한의 인구수는 약8,981,500名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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