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여행풍경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시인김남식 2018. 12. 8. 18:15

대고려 그 찬란한 도전 유물전시회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하여 마련된 이번 특별전에는 북한과 함께 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었고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일본등 국내외 46개 기관에 흩어져 있던 450여 점의 고려를 한 자리에 모았다.     



918년 태조 왕건은 분열된 시대를 극복하고 통일국가 고려를 세우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개경이 새로운 수도가 되었고 다양한 민족과 국가가 난립하던 격변의 시기에 여러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개방적이고 독창적인 문화를 이루었다




고려 시대에는 그 어느 시대보다 청동 거울(동경)이 많이 만들어졌다.

고려인들은 당시 송에서 유행하던 청동거울의 무늬와 글자를 본떠서 상당히 많은 청동 거울을 제작하였다.

거울 상단에 '밝게 빛나며 창성한 하늘'이란 뜻의 <황비창천 煌丕昌天>이 새겨진 청동 거울도 그중 하나입니다.

중국 송宋나라 양주楊州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유지성(972~1039)의 묘지석

죽은 지 6년 뒤에 다시 장사 지내면서 만든 이 묘지명에는 장사랑(將仕郞) 조의태부(朝議太夫)등의

관직명만 나열되어 있고 귀화한 시기나 동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고려시대 주변국 지도 

 

삼국사기는 1145년(인종23) 김부식(1075~1151)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역사서 국보 제322-2호.

군주의 정치 관련 기사인 본기, 신하들의 개인 전기인 열전, 통치제도나 문물 등을 분류한 지志와 연표로 구성된 기전체 방식이다.

신라. 고구려, 백제 순으로 삼국의 정치, 역사, 경제, 인물 등을 정리했다.

김부식은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는데 현종이후 고려의 왕이 신라 왕실의 혈통을 이어 받았음을 강조하여

고려 건국 초기 지배층이 가졌던 고구려 계승 의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총 50권으로 본기 28권,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 열전에는 50명의 인물이 실려 있다




삼국사기가 왕명을 받아 유교 사관에 입각해 편찬한 역사서라면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1206~1289)이

당시 전해오던 전설과 신화, 풍속, 종교 등 <삼국사기>에서는 다루지 않은 사건과 기록을 폭넓게 담아냈다.

이 책에는 삼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단군신화, 부여, 삼한, 가야, 후백제의 이야기까지 담겨 있으며 고승들의 행적이나

효를 행한 사람들, 신이(神異)한 불교 전승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록하였다.

삼국사기가 전통적인 역사편찬 방식으로 쓰여졌다면, 삼국유사는 보다 자유로운 체재로 우리에게 뿌리가 된 나라의 왕들을 기록했다.

단군에 대해 기록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 국보 제306호, 제306-2호 1281년 편찬 / 5권 2책


건칠희랑대사좌상은 건칠과 나무에 채색된 보물 제999호로 해인사에 보관중이다

희랑대사는 왕건의 정신적 지주로 후삼국 시대에 수세에 몰린 왕건을 도왔으며 고려 건국 이후는 왕의 스승이 되었고

고려를 지속하게 하는 힘의 상징이었다

건칠(乾漆) 희랑대사 좌상은 희랑대사의 얼굴과 신체, 체격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초상조각으로 10세기중반 조각 가운데

최고의 걸작이자 우리나라에 유일한 고승 초상조각이다.

앞면은 건칠, 뒷면 일부는 목조로 이루어졌는데, 이렇게 재료를 혼용하는 일은 이례적이며 지금의 채색은 18세기 이후에 보수하면서

입혀진 것이며 가슴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화랑대사가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함으로써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전을 도왔다는 이야기가 해인사에 전해온다.





욍건초상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고려 왕실을 상징하며 신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기에 951년에 태조상(太祖像)을 제작하여

왕실 사찰인 봉은사에 초상을 모시고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국왕이 직접 분향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성리학(性理學) 제례법(祭禮法)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1429년(세종11) 개성왕건능(현릉)옆에 매장되었다.

그후 1992년 북한이 왕건릉(王建陵) 확장공사 중 포클레인 기사가 땅을 파 내려가던 중 삽에 동상(銅像)이 걸려 나왔다

현재 평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태조 왕건상은 앉아 있는 상의 높이만 138cm 이며

묻힐 당시 비단옷을 입고 허리에는 옥으로 만든 허리띠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천은 부식되었고 청동상과 허리띠만 출토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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