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여행풍경

청도 새마을운동 발상지

시인김남식 2009. 6. 14. 15:08

청도 새마을운동 발상지


새마을 운동의 첫시작 청도군이라고 한다

경부고속도로 청도새ㅔ마을휴계소에 가면 그 기록을 알수가 있다



새마을 운동은 1969년 8월 초 경상북도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에서

수해 복구 현장을 목격한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1970년부터 시작됨으로써

경상북도 청도군은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부산 대구 경부고속도로 새마을 휴계소에서




새마을운동은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안으로 처음 시작된다.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우리 농촌을 우리 스스로 바꿔보자는 취지였다. 이후 근면·자조·협동이라는 말은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일상적 단어로 전국에 퍼졌다. ‘잘살아보세’와 ‘새마을노래’는 애국가에 버금갈 정도로 곳곳에서 불렸다. 그러한 새마을운동의 중심지가 경북 청도다. ‘신도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때의 이야기다.

“남은 건 절망뿐이었다. 미처 손 쓸 틈도 없었다. 탄식은 길었고, 넋 나간 한숨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1969년 6월 ~ 8월. 기습 폭우로 전국의 농촌은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길은 끊어지고, 둑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범람한 물에 휩쓸려온 쓰레기가 농작물들과 뒤엉켜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키우던 가축들은 진흙더미에 깔려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참담함 그 자체였다. 농민들에게 남은 것은 ‘비탄’과 ‘허탈’뿐이었다. 작은 희망마저 수마에 휩쓸려 간 듯했다.
겨우 복구에 나섰지만, 그마저도 역부족이었다. 변변한 농기계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수마가 할퀸 아비규환의 현장을 사람의 힘으로 감당하기란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비보는 연일 들려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도저히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임자 전용열차 대기시켜. 홍수피해가 큰 경남지역으로 가봐야겠어.”
열차가 이동하는 내내 박대통령은 착잡하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 농촌이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서든 빈곤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박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온통 ‘잘사는 농촌’ 생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뾰족한 답이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만은 없었다. 깊은 고민이 박 대통령의 마음을 내내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였다. 청도군 인근을 지날 무렵이었다.
“임자, 잠깐 기차 세워!”
“예?”
수행원은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뭐 좀 봐야겠어. 뒤쪽으로 후진시켜.”
박 대통령은 거침이 없었다. 멈춘 기차는 서서히 뒤로 움직였다.
“여기가 어디야?”
“청도군 신도리라는 곳입니다.”
기차가 멈춰선 곳은 경북 청도의 한 작은 마을, 신도리였다. 경부선 철로변에 위치한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본 신도리는 달랐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힘을 모아 제방 복구와 마을 안길을 보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박 대통령이 우연히 차창 너머로 본 것이다.
“신도리? 임자, 지금 마을로 들어가 봐. 어떻게 마을을 이렇게 가꿨는지 주민들에게 물어봐.”
마을로 들어선 수행원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변변한 길조차 없는 다른 농촌과는 확연히 달랐다.
뒷산에는 산림이 우거졌고, 집은 개량된 지붕으로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마을 안길은 시원스럽게 닦여 있어 우마차가 불편함 없이 다니고 있었다.
“기왕 마을을 복구할 바에야 좀 더 잘 가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 보자고 마을총회에서 결의를 했습니다. 주인들이 하나같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수행원은 자신이 본 마을 풍경과 주민들의 말을 그대로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박 대통령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짧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래 이거다. 농촌이 잘 살려면 농민들 스스로가 일어서야 한다, 그 토대를 정부가 만들어 주고 지원하자.”

박 대통령의 새로운 농촌개발 구상은 그렇게 싹을 틔우고 있었다. 당시 한국 농촌은 빈곤의 악순환에 허덕이고 있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있던 1960년대 말에도 농촌의 환경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박대통령이 가장 고민했던 것은 농촌이었다. 특히 농민들의 의식이 문제였다. 패배주의와 냉소가 팽배해져 ‘해 보겠다’는 의지 자체가 없었다.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못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희망과 의욕이 없으니 나태해질 수밖에 없었다. 농한기에는 도박이나 술독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나마 일부에서 무엇인가해 보자고 권유해도 “협동”이란 손해 보는 일이라 생각하며 나서기를 꺼렸다.


하지만 신도마을은 달랐다.

농촌 환경 개선사업을 1957년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다.
주민들은 농가소득증대를 위해 길을 먼저 넓혀 나갔다. 마을 뒤쪽 골짜기 뒤실마을과 현재 위치인 새터마을을 잇는 ‘토끼길’ 2.5km를 40여일 만에 폭 4m의 농로로 만들었다. 1959년부터는 부엌 개량, 축담 개축, 옥내장식 등을 점차적으로 진행했다.
신도 마을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1년에는 부업장려 사업으로 가구당 감 묘목 50그루, 복숭아 10그루, 사과 1천 그루 이상 갖기 운동을 시작했다. 1963년에는 생활개선구락부 운영, 1통장 갖기 운동, 새마을금고 육성 등이 이어졌다.

신도 마을 방문 8개월 후인 1970년 4월 22일,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의 원형이 된 ‘새마을 가꾸기 사업’을 전국 지방장관회의에서 제창한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청도 신도마을 사례를 직접 소개하면서 자신의 구상을 피력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습니다.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5천년 묵은 가난을 몰아내도록 그들의 의욕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먼서 농촌의 생활환경을 바꾸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부터 벌여보도록 합시다.”
새마을운동의 역사적인 첫 페이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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