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 (1418~1456) 묘역 솔새김남식
위 치 ;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에 있는 조선초기 문신 성삼문의 묘
주 소 ;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산 58
가는길 ; 가야곡면에서 양촌면으로 가는 697번 지방도 오르막 고갯길을 막 내려 가면 성삼문 묘역으로
앞에는 저수지가 있어서 낚시터로 부산하다
사육신 드라마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세조에게 나으리라고 부르며 항거하는 성삼문은
시뻘겋게 달군 쇠로 다리를 꿰고 팔을 잘라내는 잔혹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왕을 전하라고 하지 않았다
사육신 중에서 가장 참혹한 거열형을 당한 그 시신을 전국으로 돌렸다고 하는데 성삼문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현재의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의 산 고개를 넘던 인부가
“날도 덥고 무겁고 피곤해 죽겠네…….” 하면서 불평을 하자 성삼문의 시신에서
“그렇게 무겁고 귀찮거든 아무 데나 묻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고 하는데 그 사람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인부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자 주변에 선비들이 성삼문의 시신을 근처 산에 매장하여
오늘날의 성삼문 묘소가 되었다고 전해 오는데 지금도 사람들은 그 고개를 성삼문고개라 부른다 한다.
성삼문 사당은 창녕성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10월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성삼문은 1418년 충남 홍성군 적동면 외가에서 무관인 성승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매죽헌 1435년 생원시험에 장원으로 뽑혔으며 1438년 식년시에 합격하여 진사 벼슬에 올랐으며
1444년 임금이 직접 참석하는 전시에서 하위지와 함께 장원 급제를 하고 집현전 학사가 되었다.
묘역 입구에는 下馬卑가 서 있다
굳은 절개를 의미하듯 사당에서 묘역으로 이르는 100여미터 길엔 상록수들이 나란히 길게 도열해 있다.
비석의 글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비롯하여 온가족이 죽음으로 몰고 온 성삼문은 235년이 지난 1691년(숙종 17) 관직이 복위되었으며
그리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문' 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문의 글자는그간의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좌부승지로 있던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장군도 함께 참형을 당했다
한편 성삼문 부인의 묘는 충남 홍성군 홍북면 대인리 산24 에 성승 장군과 함께 이웃하여 묻혀있다
성삼문이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 갈때 여섯살난 어린 딸이 따라오며 울부짖으니 선생이 말하기를
"사내 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
하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임의 밥 임의 옷을 먹고 입으며 일평생 먹은 마음 변할 줄이 있으랴 이 죽음이 충과 의를 위함이기에
현릉 푸른 송백 꿈 속에서도 못 잊어라"
그래서 인지 묘소로 이르길에는 잣나무가 일렬 종대로 서 있다
그때 그날이 문득 재현되고 있어서 이곳을 찾아온 나그네의 가심이 매우 아팠다.
나홀로 참배를 마치고 잠시 인증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