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경교장이 광산부자 최창학에 의해 건립되었을 때
경교장(京橋莊)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1876년~1949년)이 광복을 맞이해 1945년 11월 23일 중국으로부터 돌아와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급서(急逝)하기까지 거주하며 정치활동을 전개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은 단순히 김구 선생의 거소(居所)만은 아니었습니다. 이곳은 대한민국이 법통(法統)을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각료들이 김구 주석과 함께 국내로 돌아와 머물렀고, 또 여러 차례 국무회의가 개최되는 등 임시정부의 사실상 마지막 청사로서의 기능을 한 곳이기도 합니다.
♣ 1945.12.6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경교장 현관에서 기념 촬영을 한 김구 주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군정에 의해 해방 정국에서 점차 소외 되면서 부터는 이승만의 이화장(梨花莊)·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 등 당시 정세를 이끌어가던 세 구심점 가운데 하나로서 신탁통치 반대운동·남한 단독선거 반대운동, 남북협상운동 등이 전개되는 주무대가 된 곳입니다. 한 마디로 광복 후 우리나라 현대사의 굵직굵직 했던 사건들이 대부분 이곳을 무대로 전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945년 12월~1946년초 신탁통치 반대운동의 중심지가 된 경교장. 발코니위에 김구주석 이시영 국무위원 등 임시정부 요인들 모습이 보인다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저항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김규식과 함께 북행을 결행한 김구 선생의 모습
경교장은 남북협상 그 막후 무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경교장의 처음은 어땠을까요?
경교장은 일제 강점기에 광산 경영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해 조선의 3대 부자(민영휘·김성수·최창학)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던 최창학(崔昌學 : 1891년~1959년)이 그가 살 저택의 일부로 1938년 세운 건물입니다. 이 양식 건물의 서북쪽 후면에는 최창학이 주로 거주하던 한옥이 자리했습니다.
♣ 1938년 당시의 최창학의 모습 - 당시 49세
건립 당시 지번은 게이죠 후(京城府) 다케죠오 쵸오(竹添町) 잇쵸오메(一丁目) 이치반치(一番地)였는데요,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제2대 주주선 일본공사를 지낸 다케죠오 신이치로오(竹添進一郞)의 이름을 딴 다케죠오 쵸오(竹添町)에 위치했던 관계로 최창학이 거주할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 처음 세워질 당시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최고급 자재를 쓰고, 또 건물을 빙 두른 담장은 '만리장성'처럼 웅장하여 1938년 2월호 《광업시대(鑛業時代)》의 기사에서 '아방궁'이라고까지 표현되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또 호화로왔던 모양입니다. 최창학이 이와 같은 저택을 지은 것은 아무래도 1938년 그의 나이 49세 때 이루어진 그의 재혼과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1938년 3월호 《광업시대(鑛業時代)》에 보면 장안의 인기남 최창학이 역시 경성에서 재원으로 잘 알려진 김정자(金貞子)라는 여성과 1938년 1월에 결혼한 기사가 실려 있는데 죽첨장은 그 여성과의 새로운 생활을 위한 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 최창학의 재혼이 기사화된 1938년 3월호《광업시대(鑛業時代)》
그러나 그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듯합니다. 그는 재혼한 부인과도 얼마 안 가 헤어졌고, 좌파(左派)로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려 하다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기도 했던 그의 맏아들은 결국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 최창학 장남이 상해 임시정부에 원조를 하려다 발각된 사실이 보도된 1934년 6월 18일 조선중앙일보 기사
어찌됐든 그는 광복 후 1945년 11월 23일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김구 주석에게 죽첨장을 무상 '사용'토록 제공합니다.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 후 비행기 1대를 기증해 일본 군부를 감동시킨 바 있고, 1938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화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기금으로 10만원이나 기부하는 등 눈에 보이는 친일행위를 한 최창학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정치적 보험'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1945년 12월 10일에는 홍명희, 오세창 등과 함께 경교장이 있는 자신의 집(竹添町 1번지)을 본부로 하는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大韓獨立愛國金獻誠會)를 조직해 '새나라 건설자금' 마련을 위해 18,000원을 모집하는 운동을 벌이기까지 합니다. 광복을 계기로 '일대 변신'을 하는 셈입니다.
♣ 비행기 1대를 일본 군부에 기증한 최창학의 기사가 게재된 1937년 7월 18일자 동아일보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10만원을 기부하였다는 기사가 실린 1938.6.14 매일신보
♣ 최창학의 대한독립애국금헌성회 조직 기사가 실린 1945년 12월 11일 자유신문
그러나 그는 김구 선생이 1949년 6월 27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급서(急逝)하게 되자 재산관리인을 통해 경교장의 반환을 요구하여 서거일로부터 약 58일 후인 8월 22일 김구 선생의 둘째 아들 김신 등 유족들은 경교장을 떠나게 됩니다. 임시정부에게 경교장을 사용하게 할 때에도 최창학은 경교장 뒤 한옥에 그대로 거주하며 건물 내 각 실의 가구를 옮기지 못하게 하고, 중요 물품은 경교장 내 창고에 보관하며 수시로 들락거리며 없어지지나 않았는지 감시했다고 합니다. 또 군중들이 경교장에 몰려들 때면 군중들이 홀에 신발을 신고들어가 홀을 더럽히지는 않을까 기웃기웃하며 눈치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는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이신 선우진 선생이나 김태헌 경교장 경비경찰 등의 증언으로 확인되는 사항입니다. 그러니 김구 선생이 돌아가신 후 유족을 비롯한 경교장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을 것인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 김구 선생 서거사실이 보도된 1949년 6월 27자 동아일보
선우진 선생은 2009년 1월 출간된 《백범 선생과 함께 한 나날들》에서 "경교장의 원주인인 최창학씨 쪽의 재산관리인이 집을 비워주웠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경교장을 헌납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교장 2층 백범 선생 방 옆에 목욕탕과 화장실 사이에 창고(최창학 당시는 하녀방)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안에 최창학씨 물건이 있었다. 한 달에 한 차례 정도 최창학씨네 사람들이 와서 열어보곤 했다.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반탁운동이 전개될 때 수백 명이 경교장에 오가고 하니까 최창학씨네 사람들은 집이 망가진다고 얼굴을 찌푸렸다. 경교장에서 문상객을 받을 때도 그들은 집에 조금이라도 흠이 가지나 않을까 안절부절 못했었다. 결국 경교장을 비워주게 되었다."라고 하여 유족들이 경교장을 비워주게 되던 때의 전후사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949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도 짤막하게 그와 같은 사정을 암시하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 경교장이 최창학에게 반환되었다는 기사가 실린 1949년 8월 25자 동아일보
최창학 입장에서 보면 '보험'의 효력이 없어진 마당에 자기 재산을 김구 선생 유족에게 순순히 넘겨줄 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해서 경교장은 그 역사성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사용되고 또 훼손되어지게 되었는데요, 한국전쟁 전에는 자유중국 대사관으로 일시 사용되다 전쟁 기간 중에는 미군 특수부대의 주둔지가 되었습니다. 모두 최창학이 소유하던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최창학은 1956년 개설되는 주한 월남대사관에 경교장을 빌려주었다가 1957년 완전히 매각합니다. 월남대사관은 1967년까지 경교장에 둥지를 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월남대사관이 1967년 10월 회현동으로 이전하면서 1967년 고려병원(오늘날 강북삼성병원)측에 매각된 후 1968년 부터 2010년까지 줄곧 병원시설로 사용되었습니다.
어쨌든, 해방정국에서 최창학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1949년 반민특위 특별 조사부의 불구속 조사를 받았으나 특별한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산 중고등학교 이사장을 지내고, 고리 대금업으로 부를 이어가다 1959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 최창학이 고리대금업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상고할 계획이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린 1957년 11월 11일자 동아일보
♣ 최창학 사망 기사가 실린 1959년 10월 14일자 동아일보
아래는 1938년 8월호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에 실려 있는 준공 당시의 사진입니다.
♣ 《朝鮮と建築》상의 건물 전경 - 양식 건물 뒤로 최창학이 거주하던 한옥으로 추정되는 건물들이 보인다.
♣ 《朝鮮と建築》상의 전면과 우측면 - 우측면엔 지금은 사라진 베란다가 있었던 것 같다.
아래는 1946년 초 『LIFE』紙의 Carl Mydans기자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각료들을 찍은 사진인데
이곳이 바로 위에 게재한 <주인 서재>란 공간에서 촬영되었고, 또한 붙박이 책장과 소파, 그리고 커튼까지 최창학이 건립했을 때와 큰 차이 없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 '서재'에서 임시정부 각료들을 뒤로 하고 김구 선생이 서 있는 모습
♣ '서재'의 붙박이 책장 앞에서 포즈를 취한 임시정부 각료들
- 1열(왼쪽에서 오른쪽으로) : 재무부장 조완구·내무부장 신익희·외무부장 조소앙, 2열(왼쪽에서 오른쪽으로) : 법무부장 최동오·선전부장 엄항섭
최창학에 의해 건립되고 또 최창학에 의해 그 역사적 위상이 훼손되기 시작한 경교장. 그 경교장이 60년만에 서울특별시에 의해 복원. 김구 선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비원(悲願)이 서린 이 역사적 현장이 제대로 복원되어 국민 곁으로 하루 빨리 다가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글 사진 출처 - 서울시 정부수반유적 홈폐이지에서 sols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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