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여행일기

퇴계종택& 퇴계선생묘

시인김남식 2017. 5. 29. 09:44

퇴계종택과 퇴계선생묘  솔새김남식


퇴계종택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 42호로 도산서원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퇴계 이황(1501-1570)의원래 건물은 없어졌으나 1929년 선생의 13대 사손 하정공이 옛 종택의 규모를 참작하여

지금의 터에 새로 지었다.



사대부집의 공간영역을 갖추고 있으며 솟을 대문과 정자 등 품위와 규모를 갖춘 종가로 전통생활도구도 비교적 잘 남아있다





현재 이곳은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퇴계종택 옆으로는작은공원도 있다.


선비문화 수련원도 함게 이웃하고 있다




가파른 오르막 산길이라서 여러번 쉼을 하고 올라가야 한다




퇴계 묘소 앞에는 '죽어서도 시아버지(퇴계)를 모시겠다'며 시아버지 곁에 묻어 달라고 당부한 선생의 맏며느리

 금씨 부인의 묘가 있어 효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조금 더올라가야 퇴계선생의 묘를 만날수 있다


퇴계선생 묘에 올라보니 선생의 명성에 비해서 묘역도 넓지 않았으며, 석물도 단촐했다.


묘역 좌우로는 문인석과 망주석 한쌍이,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 그리고 동자석 한쌍이 서 있으며, 묘비는 봉분 우측에 서 있다




퇴계선생 정도의 명성이면 묘비 뿐만 아니라 최소한 신도비는 있을 법한데, 없었으며
묘역 좌측에는 비석을 세웠던 받침돌이 있는데, 아마도 묘비가 훼손되어서 후대에 묘비를 새로 세운 것 같다.


퇴계선생 묘는 국가 지정 문화재는 커녕 향토문화재로도 지정되지 않았다
다른 묘들을 가 보면 문화재적 가치가 없는 곳도 인물을 보고 문화재로 지정한 곳이 상당히 많은데 그 이유는 몰겠다.



이황(李滉 1501년~1570년)

조선 명종, 선조 시대의 명신.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시호는 문순(文純)

이황은 연산군 7년(1501년), 경북 예안군(오늘날의 안동)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마흔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했다.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그때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퇴계를 가르쳐서 1527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사헌부 지평, 성균관 사성, 단양 군수, 풍기 군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풍기 군수 시절에 소수서원(紹修書院) 사액을 실현시켰다.

선조 즉위 직후 임금에게 올린 성학십도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나타낸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남인(南人) 계열의 종주가 되었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광해군 치세인 1609년에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이이와 더불어 한국의 성리학의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기에 대한민국의 1000원권 지폐 앞면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