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청 태극기게양
9.28 서울수복과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괴는 ‘폭풍’이라는 공격명령과 함께 서쪽의 웅진반도 부터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 등 11개 지점에 이르는 38도선 전역에서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그리고 준비안된 우리 국군은 3일만에 서울을 버리고 대책없이 후퇴를 거듭하다 초대 미8군사령관인 워커장군의
‘죽기살기 전략’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게 된다.
워커장군의 낙동강 방어선 버티기는 동경의 맥아더장군에게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는 아주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고
여러 조건과 어려움을 들어 만류하는 주위 참모들에게 맥아더는 “그 어려움이 승리를 가져온다!”고 설득하며
작전을 성공시켰던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북괴 남침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우리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맥아더장군의
승리에 대한 신념이 만들어낸 하나의 기적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은 260여척의 함정과 7만여명 병력으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는데
인천상륙 성공을 위한 혼란야기 협공작전 일환으로, 그날 아침 일찍 동해의 영덕 남방 장사동 상륙작전도 전개한
맥아더장군의 치밀한 작전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바로 다음날 부터 낙동강 전선, 대구 전선, 남부 전선, 통영 상륙작전등 전국적으로
유엔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어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한다.
9.28...서울 수복 유엔군 4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인천에 상륙한 맥아더장군은 서울 탈환에 박차를 가한다.
그 당시 ‘서울탈환 대작전 선발대’에 한국군은 제외되어 있었는데 상륙작전 때 한국 해병대의 활약상을 지켜본 맥아더장군이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에게 “서울 선두 입성은 한국 해병대에 양보하는게 어떻겠소?” 하고 제안했고
이를 알몬드장군이 받아들여 이뤄졌다고 한다. (정일권 회고록)
서울 탈환은 만만치 않았다. 북괴군은 개전 이래 최대의 저항을 했다.
특히 이화여대 뒤 ‘연희고지 전투’는 북괴군의 저항이 가장 심해 서울 탈환작전의 최대 고비였으나 이틀만에 가까스로 성공했다.
인천상륙 10일만인 9월 25일에 우리 해병대가 미해병 1사단과 함께 덕수궁에 도달했고,
유엔군은 한강을 도하 남산을 점령했다.
한미 해병대의 본격적 시가지 소탕 전투가 전개 되었는데 북괴군의 극렬한 저항을 뚫고 서울시청을 접수,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를 내려 인공기와 함께 불태워 버렸다.
9월 26일. 북괴군은 이날 밤에만 3회에 걸친 반격을 감행하였고 서울 중심지에 총소리와 포성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9월 27일 새벽 3시, 한국 해병대 2대대 6중대 박정모소위 양병수해병 최국방해병
이 세사람은 태평로와 세종로를 뚫고 중앙청 진입에 성공했다.
박정모소위는 미리 준비한 대형 태극기를 온 몸에 감고 장대를 들고 중앙청 건물 위로 올라갔으나
중앙청 돔에 오르는 철재 사다리가 파괴되어 결국 세 사람 혁대를 연결한 로프를 만들어서야 어렵게 올라갈 수 있었다.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드디어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해병과 유엔군 5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서울 탈환은 막을 내린다.
괴뢰군은 1,700여명의 사상자에 650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중근 편저 ‘6.25전쟁 1129일’에는 9월26일 정오에 태극기를 게양했다고 함)
9월 28일 아침. 미 해병 1사단장이 서울 소탕작전 완료를 보고 하자 알몬드 장군은 서울 탈환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다음날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장군과 함께 항공으로 서울에 귀환해 중앙청에서 환도식(수복식)을 거행했다.
9.28 서울수복 기념식 중앙청에서 박정모 해병소위가 태극기를 게양하는 역사적 사진은 후에 별도로 찍은 것으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그 사진에서 가슴 한 켠 벅차오름을 느낄것이다.
그러나 서울을 3일만에 점령하고 승리를 확신하다 3개월 만에 다시 서울을 빼앗긴 김일성에게는 ‘통한의 날’ 로 기억될 것이다.
매년 9월 28일 되면, 서울시와 해병대 공동주관으로 ‘9.28 서울수복 기념행사’를 갖고, 그 날의 역사적 의미와
다시는 서울을 빼앗겨선 안된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서울에서 뿐 아니다.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매 년 9월 28일이 되면 유엔군으로 6.25에 참전한 용사들과 교포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수복 기념모임’을 갖고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상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