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대한민국

동작동 국립현충원

시인김남식 2016. 6. 4. 16:13

국립현충원과 호국원 솔새김남식



국립현충원은 4호선 동작역 2번출구로 나가는데 출구까지 그리고 현충원까지의 거리가 좀 먼 편이다  


서울 동작동 국립 서울현충원은 나라를 위해 힘쓰신 국가 유공자를 모신 공동묘지이다.

그리고 이곳은 면적 143만㎡로 서울에서 가장 큰 도심공원이다.

하루 평균 입장객만 1만 명이 훨씬 넘는다.

봄에는 벚꽃이 좋고 가을엔 단풍이 좋다.

현충원 양쪽에 조성된 차 없는 길 ‘솔냇길’은 산책코스로 그만이다


또한 입장료· 주차료도 없다.

실제로 돗자리 펴고 도시락 먹는 가족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참고로 서울현충원은 풍수적으로 천하의 명당으로 관악산 줄기를 배경으로 하고 한강의 노량진을 내려다 보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이다.




한때는 서울 현충원을 국립묘지라고 불렸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산화한 호국 영령을 위해 1955년 건립한 국립묘지는

20년만에 안장 능력의 한계치에 다다른다

그래서 대전에 국립현충원을 세우고 경북 영천과 전북 임실 경기도 이천에 호국원을 또 두었다.

호국원은 만장되어 가는 국립현충원을 대체하고 더 많은 대한민국의 국가 유공자를 안장하려는 취지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의 마지막 공간을 국가가 직접 관리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면서

2006년 1월 30일에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국립묘지는 경남 마산에 3·15 묘지, 서울 수유동에 4·19 묘지, 광주 5·18 묘지

그리고 대전 현충원이 생기면서 2006년 동작동 국립묘지는 국립 서울현충원이란 새 이름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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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호국원(National Cemetery)은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에 국립이천호국원,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에 국립영천호국원,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에 국립임실호국원,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 국립산청호국원이 위치해 있으며,

또한 충청북도 문광면에 국립괴산호국원이 2018년 개원할 예정이며, 

국립제주호국원도 조성을 추진중에 있다.

안장대상은 

무공수훈자 전상, 전사, 순직, 공상군경 6·25 참전군인 학도병유격대원 소방철도공무원 종군기자

기타참전자 월남참전군인 6·25 참전경찰 10년이상 장기복무한 군인 위 목록에 해당하는 자의 배우자이다

 

 

현재 서울 현충원에는 모두 16만5000여 분이 모셔져 있다.

시신은 5만4 000여 위이고, 나머지는 위패다. 나라를 위해 싸운 군인만 계신 게 아니다.

정치인·경찰은 물론이고, 상해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독립운 동가도 계시다.

베를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선생, 아동문학가 윤석중 선생,

국제보건기구(WHO) 사무총장 이종욱박사 등도 국가사회공헌자 자격으로 모셔져 있다.




외국인도 계시다.

캐나다인 프랭크 스코필드(1889 ~1970) 박사와 한국전쟁 때 통역관으로 복무했던 화교 두분이

국가 유공자 자격을 인정받아 안장돼 있다. 특히 스코필드 박사는, 일제의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을 현장 촬영해

일제의 만행을 해외에 알린 독립운동가다.

그의 묘비에 한국인 이름 ‘석호필’이 새겨져 있다. ‘석호필’은 요즘 ‘미드’에서 처음 나온 게 아니다.


서울현충원에는 이승만·박정희,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이 모셔져 있으며 최규하 대통령은 대전 현충원에 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독립된 봉분에 따로 모셔져 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합장돼 있다.

분명한 이유가 있다.

육영수 여사는 순직했기 때문이다.

영부인 자격으로 74년 8월 15일 광복절 행사에 참석했던 육 여사는 문세광이 쏜 흉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와 같은 공로로 육 여사는 국가 유공자 자격을 얻었다. 이걸 아는 이가 드믈다.

 

박정희 대통령내외분 묘지




묘엳 여러곳을 돌아 다니며 그들이 마지막 생을 마친 곳 그날의 치열한 전투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국립묘지는 . . . .

1952년 5월 26일 국방부 주관으로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 위하여 3군 합동답사반을 편성하고

1952년 11월 3일 군묘지설치위원회를 구성한 후

1952년 11월부터 1953년 9월까지 11개월 동안 7차에 걸쳐 10개 지역을 답사하였다.


답사 결과 동작동 현 위치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하여 1953년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하고 1954년 3월 1일 정지공사를 착공한 이래 3년에 걸쳐 조성하였다.


1955년 7월 15일 군묘지 업무를 관장할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되고

이어서 1956년 4월 13일 대통령령으로 군묘지령이 제정되어 군묘지 운영 및 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틀이 마련되어

전사 또는 순직한 군인, 군무원이 안장되고 덧붙여 순국선열 및 국가유공자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안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6.25 전쟁으로 발생한 많은 전사장병 처리를 위해 지금까지 군인위주로 이루어져 왔던 군묘지 안장업무가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령으로 재정립되어 애국지사,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대됨으로써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삶을 희생하고 아울러 국가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분들을 국민의 이름으로 모시게 되어

그 충의와 위훈을 후손들에게 영구히 보존, 계승시킬 수 있는 겨레의 성역으로서 국립묘지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2005년 7월 29일 국회에서 의원입법으로 제정 공포된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의거

동작동 국립묘지 의 명칭이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고 소방공무원과 의사상자도 안장대상자에 포함되었다

월남전 옛전우를 찾아온 노병들이 모여 추억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창빈안씨묘역

국립현충원 안에 웬 조선시대 릉이 있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묘소가 조성된 것은 수백 년 전이니

어찌 보면 현충원의 애초 주인은 창빈안씨라고도 할 수 있다.


창빈안씨(昌嬪 安氏, 1499년 ~ 1549년)는 중종의 후궁이며 덕흥대원군의 생모로 살아 생전은 숙용안씨였으나

창빈으로 승격된 것은 후손이 없는 명종에 이어서 손자 하성군이 제14대 선조 임금이 되면서 릉의 대접까지 받아 

후궁으로는 드물게 신도비까지 세워젔다



창빈안씨는 9세에 입궐하여 단정 정숙한 性情(성정) 덕에 중정의 눈에 띄어 중종의 6번째 후궁으로 

1549년 숨을 거둔 뒤 경기도 양주 장흥에 묻혔으나 덕흥군이 이듬해 한양 동작리로 이장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장한지 2년 후 1552년에 선조가 태어났고 그리고 후일 명종의 후사로 왕위에 오르니 조선조 임금중에서

적손이 아닌 서손(庶孫)이 왕위의 대통을 이은 첫 번째의 사례가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부터 이곳을 명당발복(明堂發福)이라 소문이 자자했던 곳으로 예전에는 銅雀陵이라 불렀다고 한다


호국지장사

호국지장사는 원래 통일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葛弓寺(갈궁사)가 그 시초이다

 

이후 조선시대 와서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원찰로 지정되어 화장사(華藏寺)로 이름을 고쳤다


그리고 1983년에는 국립묘지에 안치된 호국영령들이 지장보살의 원력으로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뜻에서

호국지장사(護國地藏寺)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호국지장사의 건물들은 모두 아기자기하여

대웅전, 삼성각, 극락전, 지장보살 3000불단, 능인보전 등으로 이뤄져 있는데 한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다.


계단양쪽에는 돌조각으로 된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는데 무서운듯 익살스러운 듯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출입문에 사천왕이 조성된 것과 달리 이곳은 조각상만 세워져 있어서 허전해 보였지만 스스로 머리위에 지붕을 얹고 있다.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세세히 돌아보려면 하루의 시간이 필요하다. solsae k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