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본성 오녀산성과 비류수
오녀산성(졸본성)과 비류수
아침 출근 길에 통근버스를 세워놓고 직원들이 거리에서 춤 아침 체조를 하고 있다
오녀산성(五女山城)은 환인의 오녀산(五女山)에 위치한 산성(山城)으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卒本城)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에서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할큼의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 역사에 흔적을 멀리 중국에서 돈을 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해발 820m 오녀산에 200m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성을 쌓아서
천연의 요새로 고구려 특유에 축성 양식을 보여주는 오녀산성이다
산성은 대체로 직사각형 모양으로 험준한 산 위에 자리한 오녀산성은 길이가 1540m
너비 350~550m인 장방형으로 전체 약 8km이다.
성 안에는 천지(天池)라고 부르는 연못이 있는데
2천년 동안 한번도 마른 일이 없다고 하며, 깨끗하여 음료수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동쪽과 남쪽의 경사가 완만한 곳에는 성벽을 설치하였기에 고구려 멸망 이전에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성이다.
고구려 시조 주몽이 개척한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인 이 산성은 기원전 37년 부터
기원 3년 주몽의 아들인 유리왕이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길 때 까지 40년 동안 고구려 수도였다.
환인시에 있는 오녀산성으로 가는 길 이름이 오녀산로 되어 있었는데 그만큼 동북공정에서 중요한 위치이다
오녀산성은 랴오닝성과 지린성에 남아있는 100여개의 고구려산성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고
규모가 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곳도 대부분 관광객은 역시 한국인들로 시간이 없는 관계로 직접 오녀산성을 오르지 못하고
우리는 먼발치에서 눈치팅 만하고 돌아왔다
구글지도에서 검색을 해보니 지형이 정말 천에요새의 지형이었다
오녀산성은 주차장에서 999개의 급경사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고 하는데
특히 인공적인 산성이 자리한 동쪽을 제외한 3면은 천혜의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비류수
비류수(沸流水)는 요령성(遼寧省)과 길림성(吉林省)의 접경지대를 흐르는 강으로
현재 이름은 부이강(富尒江)이며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渾江) 유역에 위치하는데 고구려 개국당시
비류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고 한다
,
고구려의 발상지 중국 환인 비류수
.
오녀산성 주위를 감싸고 흐르는 비류수(혼강)와 고구려와 비류국과의 건국신화로 역사 의미를 새기어보자.
부여왕실에서 생활하는 주몽은 부여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다.
일곱이 왕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 힘들다는 걸 깨닫고 남쪽으로 내려가
새 국가를 세울 생각에만 골몰했다.
재주가 뛰어난 주몽을 시기한 왕과 왕자들은 주몽에게 말 기르는 일을 시켰다.
주몽이 남쪽에 뜻을 두고 있는 한 부여에서 생활은 의미가 없었다.
좋은 말을 골라 일부러 먹이를 주지 않고 야위게 만들어 자신에 말을 만들었다.
부여의 왕과 왕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몽의 행위는 용납될 수 없었다.
자신들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고 또 다른 국가를 건설하려는 생각은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결국 주몽은 20살때 친구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부여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부여의 입장에서 주몽의 탈출은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남쪽으로 달려갔다.
부여의 첫 번째 왕자 대소가 이끄는 군사들은 주몽 일행을 추격했다.
그러나 주몽은 배도 없이 비류수를 건넜다는 일화가 있다.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주었다는 비현실적 상황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2007년 mbc에서 80부작 방송했던 고구려시조 주몽이야기 드라마에서 주몽(송일국分)이 소서노(한혜진分)이 대역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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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당시 비류수를 사이에 두고 부여와 졸본이 대립하고 있었다.
주몽 일행이 비류수를 건너면서 부여 군사들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를 도와준 졸본 사람들 중에서 바로 소서노가 있었다
그는 탈출에 성공한 뒤 소서노와 정략적 결혼을 하게되는데...
주몽은 졸본지방에서 지역적 기반이 필요했었고
소서노 집안에서는 주몽의 강력한 지도력과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주몽은 졸본천 비류수가에 살면서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졸본의 오녀산성에
BC 37년 도읍을 정했다고 하는데 그때 나이가 22살이라고 한다
주몽은 부여에 어머니와 아내를 두고 왔는데
새나라를 건국한지 18년만에 고향에서 아들이 찾아왔다
활쏘기등 재질을 시험해보니 아버지 못지않은 명수이기에 왕위 자리를 물려주는데
바로 그가 2대 유리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