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김씨 상촌파 김자수선생 묘역
경기도 기념물 제 98호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 120-1번지
김자수는 경주김씨 상촌공파 중시조이다.
그는 고려 공민왕 23년(1374)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우왕 초에 사간원의 정언이 되었다.
이때 왜구 토벌의 공로로 포상받은 조민수의 사은 편지에 회답하는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조민수가 왜구와의 전투에서 도망쳐 많은 병사를 죽게 하였다고 이를 거절하여 전라도 돌산에 유배 되었다.
공양왕 4년(1392) 충청도 관찰사 ·형조판서에 이르렀으나, 고려 말 정세가 어려워지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다가,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1413년 향년 65세에 자결하였다.
묘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석양(石羊)과 망주석이 각 1쌍, 문인석이 2쌍 배열되어 있다.
상석 좌우에 세워진 문인석은 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의 것으로 생각되며,
묘역 앞쪽의 문인석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고, 그 밖의 상석·장명등·석양 등은 근래에 세운 것이다.
묘비는 그의 유언으로 세우지 않았으며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비)는 땅에 묻혀 있던 것을 1926년에 후손들이 발굴하였으나,
비문이 닳아 없어져 뉘어져 보관중이며 새로 채유후(蔡裕後)가 지어서 세웠다
이성계(李成桂)는 왕위에 오른 후 그에게 대사헌(大司憲)의 직을 내려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태종(太宗)은 평소 부터 그의 덕망을 존경하고 있어 형조판서(刑曹判書)의 직을 내려 부임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그는 "나라가 망하니 충의도 더불어 망하는 구나. 내가 평생에 충효를 기약하면서 살아 왔는데
이제 만약에 내가 몸을 굽힌다면 어떻게 지하에서 임금과 부모님을 뵈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스스로 죽을 곳이 있노라"고 탄식하고는 서울로 향하였다.
광주(廣州)의 추령(秋嶺)에 이르자 자손들에게
"나는 이제 죽어서 오직 신하된 절개를 다할 뿐이니, 내가 여기서 죽거든 이곳에 매장하고 라는 절명사(絶命詞)를 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는 태종(太宗) 13년(1413) 11월 14일이었고, 향년 65세였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태재에서 맞이한 것은 눈 앞으로 한양 땅이 펼쳐지고, 등뒤로는 스승인 포은 鄭夢周(정몽주) 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선택의 시간이 온 것이다.
한양이냐, 정몽주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정몽주의 길을 택한 것이다.
여자도 不敬二夫(불경이부) 하거늘 하물며 신하가 되어 어찌 두 왕을 섬길 수 있으랴하고 아들 근에게
"나는 이 곳에서 죽겠다." 하고 유언을 하기를 " 이 곳에 매장하고 비석을 세우지 말며, 행적을 金石(금석)에 새기지 말라.
나무뿌리 썩듯이 내버려 두어서 널리 알리지 않도록 하라."
혹여 알리게 되면 武人(무인) 투성인 新조정에서 자손들에 까지 해를 미치게 할 것이 염려하는 말을 남기고
그는 '絶命詞(절명사)' 시 한 수를 남기고는 독약을 삼켜 자결하셨다.
桑村 金自粹 先生 絶命詞(절명사)
平生忠孝意 평생충효의 今日有 誰 知 금일유수지 一死吾休恨 일사오휴한 九原應有知 구원응유지
평생토록 지킨 충성과 효도 오늘날 그 누가 알아 주겠는가?
한번의 죽음 무엇을 한하랴만 하늘은 마땅히 알아 줌이 있으리라.
찻아 가는 방법
서현역에서 522번 능평1리 마을회관앞 종점하차
또는 서울역 -> 외국어대 1150 ,강남역에서 1150번를 타고 때재고개하자 (약 45분 소요) 후
불곡산 방향으로 3 키로 40여분 도보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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